
개화기의 한국어 연구
갑오개혁을 통하여 한글은 드디어 우리 문자 생활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한글이 우리의 공용문자가 됨에 따라 한국어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그 문법적 체계를 수립하고 이를 표기에 응용하려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은 주시경(1876-1914)이었다. 물론 개화기에는 '독닙신문'을 보급한 서재필이나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이 「신정국문」을 상소하는 등 한글을 국자의 위치에서 널리 보급하고 체계화하려난 노력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주시경의 활동과 노력, 그리고 업적을 능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시경의 활동을 중심으로 개화기의 한국어 연구 및 한국어 운동에 대해 살펴 보겠다.
주시경은 일제침략에 항거하여 한글 보급과 한국어 운동에 일생을 바쳤으며 단순한 한국어 운동가이기에 앞서 탁월한 한국어 학자였다. 그는 배제학당에서 본격적인 서양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896년 '독립신문'의 회계사 겸 교보원이 되면서 순 한글 신문 제작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글 표기의 체계화가 시급함을 깨닫고 '국문동식회'를 조직하는 등 한국어 연구와 한글 보급에 진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주시경은 한국어 연구뿐 아니라 한국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한글 보급 및 이를 통한 민족정신 함양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간호원양성학교를 비롯하여 공옥학교, 명신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서우학교 교원 등을 역임하였고, 협성학교, 오성학교, 이화학당, 홍화학교, 기호학교, 융희학교, 중앙학교, 휘문의숙, 보성학교, 사범강습소, 배재학당 등의 강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신학문을 익히던 학생들에게 한국어의 중요성과 한글 보급 운동의 후진들을 양성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주시경의 애국애족 사상은 한국어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한 나라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빼앗긴 국권을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체계화하고 이를 보급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한문의 마술에 철저히 포로가 되어 있는 민중을 일깨워 지식 흡수를 향한 진정한 문호를 열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하여 국어를 정리하고 국어 교육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식으로 한국 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동일시하였다. 계몽운동은 주로 배재학당 협성회 전적과 찬술원, 독립협회 위원, '가정잡지' 교보원, 서우학회 협찬원, 대한협회 교육부원, 보중 친목회 제술원 등을 통하여 이루저였는데, '가정잡지'와 '월남망국사', '보중친목회보' 등에 그의 애국계몽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한국어 운동은 초기에는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국어야학과,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한 9개교를 돌면서 강의를 하고 일요일에도 조선어 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는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한글 강의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찾아가 한글 보급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의 후학들은 김두봉, 이규영, 최현배, 장지영, 이병기 등으로, 이들이 중심이 되어 나중에 조선어학회가 조직되어 한글 맞춤법 제정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주시경의 한국어 연구는 1897년의 '국문식', '독립신문' 논설인 '국문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한국어 문법 연구는 그가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터득한 합리성에 기초하여 독창적으로 개척하였다는 점에서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대표적 업적으로 필사본 「국문문법」 (1905), 유인본 「대한국어문법」 (1906), 국문연구소 유인본 「국문연구안」 (1907~1908), 「국어정음학」 (1908), 필사본 「말」 (1908년경), 국문연구소 필사본 「국문연구」 (1909), 유인본 「고등국어문전」 (1909년경) 등이 있으며, 이러한 학문적 축적을 거쳐 가장 대표적 저술인 「국어문법」 (1910)을 저술하였다.
「국어문법」은 음운 · 품사 · 구문 · 어휘의 4부로 이루어진 초기 한국어문법서를 대표하는 것이며, 한국어의 특성을 독창적 이론으로 풀어낸 것이다. 특히 구문론에서는 구조주의자들이 발견한 직소분석(immediate constiuent analysis)의 원리를 연상할 수 있는 구문도해를 최초로 창안한 점이 인상적이다.
직소분석은 1933년 미국의 언어학자 블룸필드에 의해 처음 소개된 것인데, 주시경은 이보다 20여년을 앞서 직소분석의 기본 원리를 한국어 분석에 응용한 것이다. 직소분석은 문장의 각 성분을 각기 자기와 가장 가까운 성분을 묶어 상위의 묶음으로 연속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을 말한다.
「국어문법」은 거듭하여 수정판 (1911 · 1913)을 내었고, 이후에는 유인본 '소리갈'(1913년경)을 통하여 음운론의 연구에도 그 영역을 넓혀 「말의 소리」 (1914)를 저술하기에 이른다. 그의 마지막 저술인 「말의 소리」 역시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는 또한 음운론에서 구조주의자들이 발견한 음소(phoneme)에 해당하는 '고나'를 발견하고, 형태론에서는 형태소(morpheme)에 해당하는 '늣씨'를 발견하기도 하였는데, 이 역시 서구의 구조 언어학에 수 십 년 앞선 것이다.
주시경의 이러한 연구 업적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리학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구성에 의한 것이다. 한국어 연구의 초창기에 이러한 연구를 독창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가 한국어를 바라보는 그의 민족적 계몽의식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이러한 이론들을 생각했을 뿐 아니라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 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급진적인 어문혁명을 촉구함으로써 이후 많은 한글 및 한국어 운동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트기 '한글'의 명명자로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다만 1913년 「아이들보이」라는 잡지에 '한글난'이라는 지면을 통해 '한글'이라는 명명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분명하다.
주시경은 문법이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그 말뜻의 옳고 그른 것을 능히 판단하고, 내가 글을 지을 때도 능히 문리와 경계를 옳게 쓰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문법에 대한 실용적 태도는 이후의 학교 문법 성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국어문법」은 크게 형태론인 '기난갈'과 통사론인 '짬듬갈'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난갈'의 '기'는 오늘날의 품사 구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임, 엇, 움, 겻, 잇, 언, 억, 놀, 끗'과 같은 9품사를 설정하였다. 여기서 '기'는 명사에 해당하고, '겻'은 조사에 해당한다. 또한 굴절어미들은 '끗'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조사를 포함한 굴절접사를 품사의 하나로 인정하는 것은 이론 문법의 단어의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으나 나름대로의 체계 속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동사의 관형형과 부사형은 따로 분석하지 않고 하나의 '기'로 처리하였는데, 이는 문법의 논리가 구문론적 분석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조치라는 그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주시경에 있어 단어는 오히려 생성문법의 구절 접점과 유사한 개념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기몸박굼'에서 형용사에 명사형이나 관형형을 붙이 결과를 품사의 이름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형용사 '검다'에 명사형을 붙인 '검엇음'은 '임'으로 분석되고, 관형형을 붙인 '검엇은'은 '언'으로 분석된다. 이는 생성문법에서 우 중심 규칙(right head rule)에 의해 상위 절점의 품사가 결정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주시경은 문장이 반드시 주어와 서술어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복합절의 경우 생략된 문장 구성 성분이 숨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숨은 뜻' 혹은 '속뜻'이라고 하였다. "저 사람이 노래하면서 가오"를 '저 사람이 노래하면서 (저 사람이) 가오'와 같이 분석하는 것은 생성문법의 심층구조 분석과 일치한다. 이와 같이 주시경의 문법은 독창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규범 문법적 관점에 머무르지 않고 이론 문법의 체계성까지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어사전의 편찬과 한글 맞춤법 통일안
일제 침략기 속에서 우리 민족은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정체성의 위기를 크게 겪었다. 일제는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들면서 한민족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정책을 강행했다.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이 그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말과 글을 사멸하고 고유의 이름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도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들이 있었디 때문에 해방 이후 곧바로 안정된 자주의식과 정체성으로 새로운 민주국가의 틀을 빠르게 마련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려는 노력들은 주로 한글 보급 운동과 이를 중심으로 한 계몽운동, 그리고 한국어 연구 및 표기법의 통일, 한국어 사전 제작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여러 운동들이 일제의 심한 박해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반만년을 지속해 온 우리 민족의 선진적 문화 유산인 한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갑오개혁을 통해 한글이 공용문자로서 위상이 높아지자 한글의 표기를 정리하는 문제가 시급해졌다. 1907년 국문연구소를 통하여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국권을 상실하면서 국문 표기법 문제는 다시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제는 통치의 효율화를 위해 1912년, 1921년, 1930년을 통해 언문철자법을 규범화하였다. 이는 일제를 중심으로 제정된 표기법이어서 그 체계나 효율성에 반대하는 민족진영에서는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발족하면서 우리말의 표기와 체계를 독자적으로 수립하려고 하였다.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주시경을 중심으로 한국어 연구와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됨으로써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 한국어 운동이 민족혼을 지키는 중심이라는 인식이 정립되었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조선어연구회는 창립되면서 곧바로 한국어와 한글연구를 꾸준히 해나갈 수 있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사전편찬을 위한 연구로 <한글맞춤법통일안>, <표준어사정>, <외래어표기> 등 한국어의 제반 규칙을 연구 · 정리할 수 있었다. 조선어연구회는 1913년 조선어학회로 발전하면서 한국어 연구와 함께, 당시 혼란되어 있는 한국어 철자법 제정과 표준어를 사정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이를 집대성할 수 있는 한국어사전 제작에 착수하였다.
드디어 1933년 10월 29일에 최초로 '한글 맞춤범 통일안'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이후의 수차례의 개정을 통해 1989년 시행되고 있는 현재의 통일안에 이르게 된다. 현재의 표기법은 최초의 통일안의 근간을 유지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은 남북이 분단되기 이전에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었기 때문에 분단 후 상당 기간 맞춤법 통일안을 남북이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초기의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서 주시경의 정신을 계승한 '한글파'와 박승빈 등이 주도한 '정음파' 사이에 대립이 있기도 하였다. 한글파는 표기법의 형태주의를 주장하였으며, 정음파는 간소한 표음주의를 주장하였다. 형태주의는 어간의 형태를 밝혀적는 표기로 한국어의 오랜 역사 속에서 주된 표기 방법으로 전승된 것이다. 이는 한글 맞춤법 총칙에 '표준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에서 "어법에 맞춘다."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만일 표음주의로 맞춤법이 통일되었다면 한국어의 원형을 많은 부분 손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글파와 정음파는 경음의 표기에서도 각각 각자 병서와 합용 병서를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가다'와 같이 '다'를 기본형 어미로 할지, '가오'와 같이 '오'를 기본형 어미로 설정할지에 대해서도 논란을 벌였다. 1933년 제정된 통일안에는 대부분 한글파의 주장이 관철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표기법의 근간이 성립되었다.
최초의 한국어사전은 경성사범학교 교사 심의린이 펴낸 「보통학교 조선어사전」 (1930)이다. 1938년에는 문세영이 8만 단어가 수록된 「조선어 사전」을 편찬했다. 조선어학회에서는 1947년부터 1957년까지 총 6권에 걸쳐 「조선말 큰사전」을 편찬하였다. 1929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이 사전은 16만 4125 단어를 수록하고 있는데, 한 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중단되기도 하고 6·25 전란 가운데 원고가 멸실될 위기를 넘기는 등 여러 시련을 겪으면서 탄생한 우리 민족의 기념비적인 대작이다. 현재에도 한국어사전의 제작은 계속되고 있다. 2008년 제작된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비록하여 여러 대학에서 속속 새로운 사전들이 이미 제작되었거나 제작되고 있는데, 방대한 말뭉치를 대상으로 실생활에 사용되는 새로운 단어와 올바른 뜻풀이, 개방적 사전 제작, 남북어의 통일 등을 지향하고 있다.
「조선말 큰사전」 편찬 및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주도하던 '조선어학회'는 '조선어학회사건'을 통해 고통을 겪게 된다. 이는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부풀린 사건으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데 헌신했던 한국어 운동가들에게 크나큰 시련을 안겨 주었다.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공공교육에서 일본어를 사용토록 하는 일본어교육정책을 더욱 강하게 추진하였다.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모든 과목을 일본어로 강의하는 것뿐 아니라 학교 생활에서도 일본어만을 사용토록 강제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추진한 이유는 지식인층의 저항을 탄압함으로써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지 않으면 일본의 식민지 강점이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외에 전후에도 한반도에 대한 통치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일제는 민족정신이 강한 사람을 사상범으로 분류하고 그들을 탄압하기 위해 1941년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공표하여, 민족운동이나 민족계몽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한국말을 하다가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박영옥이 서울의 정태진으로부터 민족정신을 지키도록 교육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정태진을 추격하던 중 서울에서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태진의 배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선어학회가 민족운동 단체라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 자백을 근거로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의 조선어학회 관련 학자들 33인을 검거하였다. 이들은 모두 검거과정과 취조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김양수, 김도연, 이우식, 이중화, 김법린, 이인, 한징, 정열모, 장지영, 장현식 등 16명은 기소 처분되었고, 12명은 기소 유예되었다.
기소 처분된 16명은 <치안 유지법>을 어긴 내란죄로 예심재판에 회부되어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되어 1943년 7월 1일부터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재판 진행 중 이윤재가 1943년 12월 8일에, 한징이 이듬해 2월 22일에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정열모와 장지영은 공소 소멸로 석방되고 최종적으로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함흥지방재판소에서 9회에 걸쳐 진행되어 1945년 1월에 최종 선고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 · 정태진 등은 징역 2년, 김범린, 이중화,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 이인 등은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은 무죄가 선고되었다. 유죄 선고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이다."라는 선고문에 나타나 있듯이 조선어학회가 사전 편찬 등의 한국어 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집행유예와 무죄가 선고된 7명은 석방되었고, 5명만이 수감되었다. 정태진은 복역을 마치고 1945년 7월 1일에 출옥하였으며, 다른 4명은 바로 광복을 맞아 8월 17일에 출소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어학회 사건은 단순히 사전편찬과 이에 관련된 한국어 운동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이러한 한국어 운동으로 고유 언어를 지키는 정체성 확립을 통해 민족정신을 유지하려는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 본 것이다. 이는 조선어학회의 관련자들이 그만큼 민족정신을 유지하려는 입장에서 한국어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을 공공적으로 인정하게 된 일거의 사건인 셈이다.
현대 한국어의 발전
21세기에 들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약 7천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어는 세계 12위에 드는 거대 언어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국어가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물론 인구 증가에 의한 양적 팽창에 기인한 것이지만, 북한의 사정과 비교해 보면 이러한 인구 증가도 결국은 경제적 성장을 배경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한국어는 한국의 국제사회에서의 경제적 · 정치적 위상이 높아짐과 동시에 한창 불고 있는 한류 열풍으로서 그 국제적 위상을 한껏 높이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외국인들의 수도 늘고 있을 뿐 아니라 외국인 귀화자 수가 10만 명에 이르는 등 한국과 한국어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외국인들도 점차 증대하고 있다.
한국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게 된 배경은 개화기 초기부터 노력해 온 한국어 연구와 한국어 운동을 통해 국민들의 문해력이 급속하게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국민들이 고도의 지식을 습득한 기회가 많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한글을 계승하였고, 일제 침략기간 속에서도 한글과 한국어를 체계화하고 현대화하려는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이른 시기부터 지식정보 사회를 준비하고 산업 사회의 고도성장에 차명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어의 갈 길은 아직 멀다.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된 지 거의 80년이 되었지만 국민들의 표준어 사용이나 맞춤법 표현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그 이유는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어의 표준적 사용을 어렵게 여기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맞춤법을 그저 어려운 것이라고 여기며 한국어 사전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맞춤법이나 표준어는 한국어 사전을 만드는 지침일 뿐이지 언어 사용 자체를 강제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어 학자들도 맞춤법의 세부 사항을 잘 숙지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일반 국민들이 이를 따르도록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결국은 올바른 한국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문법 교육과 사전 활용에 대한 교육이 근간이 되고, 글을 쓰고 이해하기 편한 사전으로의 진화를 도모하는 것이 더욱 필요한 실정이라고 하겠다.
문법은 앞서 주시경의 서술대로 '글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쓰는 능력'을 제고하기 위해 한국어의 체계를 세우는 일이다. 이러한 일들이 이론적 연구에 머물러 일반 국민들에게 어렵게 다가가서는 오히려 국민들의 문해력을 낮추는 결과만 낳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글을 쓸 때 사전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사전을 활용한 글쓰기 지도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법 교육과 글쓰기 교육의 전반적인 쇄신이 필요하다.
현대는 지식정보 사회이고 아는 만큼 자신의 성장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글로벌 경쟁 속에서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글로벌 인재의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창의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들고 있다. 이 모두가 언어에 의해 창출되는 능력이다. 한국어로 된 지식이 충분치 않으면 이를 기반으로 창의적인 생각을 도출할 수 없고, 문장을 간결하게 표현하여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면 자신의 창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처럼 한국어 교육은 국가의 글로벌 인재를 기르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면서 최우선적인 과제가 된다. 이를 위하여 한국어 자체에 대한 연구 및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기반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본 포스팅은 아래에 있는 책의 일부임을 밝힙니다. 고창수(2011), 한국어의 역사와 문화, 도서출판 지식과 교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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